쿠로코의 농구 :: AU 모음

[쿠로바스/조각] 십이야 AU 上

만화 기반 | 적흑. 재흑. 도흑도. | 수위 X | 주의: AU. 여장 소재. 웹툰 스포일러

* 다음 웹툰 십이야 AU: 이야기 및 설정은 모두 다음에서 연재되었던 웹툰 <십이야>에서 가져왔습니다. 지명과 인물, 사소한 설정들만 바뀐 정도.

* 인물 관계 날조: 이야기와 설정에 맞춰 인물 관계가 날조됩니다.

* 흑우 요소 多: 적흑, 도흑도, 재흑 중심.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흑우.

* 스포일러: 원작 웹툰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굉장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싫으시다면 뒤로. (개인적으로 원작을 읽으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 여장 소재: 주인공이 여장을 합니다.

* 약 폭력, 고어 소재: 심하지는 않은데 조금 잔인한 부분도 섞여 있습니다.

* 캐붕요소 有: 심각한 캐붕은 아니지만 캐붕으로 보일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본 글의 이야기, 세계관, 설정의 기반은 무류 작가님의 다음 웹툰 <십이야>에 있습니다. 또한 인물은 만화 <쿠로코의 농구>를 기반으로 합니다. 고로 해당하는 요소들에 대한 권리는 각 작품의 작가님 및 관련 제작사에 있습니다. 저는 글만! 





Story Written by 시나래



(1) 10년 전 테이코 왕국의 왕궁은 피로 물들었다. 

  죽음이 죽음을 몰고 온 날. 

  테이코 국왕은 오랜 지병을 앓고 있었고 결국 장수를 누리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 갑작스러우면서도 예견되었던 일이었다. 물론 계승에 있어서는 문제가 될 부분은 없었다. 왕에게는 왕후에게서 난 적통 대군이 있었고 이미 정식으로 왕세자 책봉까지 마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순리대로라면 이제 막 열 살이 되어 가던 세자가 보위에 오르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왕이 붕어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왕궁에 군사가 들이닥쳤다. 깊어가던 밤을 가르는 비명 소리와 불길이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윗전에게 소식을 알리기 위해 다급하게 뛰어다니던 궁인들은 가차없는 칼날에 베여 쓰러져 갔다.

  그 난리통에 건재한 곳은 오직 홍염당, 왕의 후궁 회빈(灰嬪)의 거처 한 곳 뿐이었다.





(2) 테츠야는 자신을 세차게 흔들어 깨우는 스승 아이다 카게도라의 손에 비몽사몽 눈을 떴다. 흐릿한 눈앞에 보이는 것은 왕후, 그리고 굳게 닫은 창문에 비치는 붉은 빛, 그리고 의복을 모두 갖춰 입고 선 세이쥬로의 모습. 

  왕후는 직접 테츠야의 옷을 입혔다. 잠이 덜 깬 상황에서도 상황의 심각함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방 안까지 흘러들어오는 불빛, 비명과 고함이 뒤섞인 소음, 그리고 스승과 왕후의 긴박한 움직임까지 심상치 않은 것들 투성이였다.

  마지막으로 테츠야의 옷을 단단히 여미는 왕후의 손이 미약하게 떨려왔다. 눈물이 어린 것 같은 눈으로 테츠야를 보던 그녀가 아이를 껴안았다.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속삭이고는 아이를 놓아준 왕후는 차분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았다.

  뛰어오는 심장.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의문들. 그 모든 것을 어찌할 새도 없이 카게도라가 문가에서 소리쳤다.

  "저하!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떠나셔야 합니다!"

  스승의 재촉과 세이쥬로의 손길에 끌려 나가던 테츠야가 마지막으로 왕후를 향해 돌아보았다. 붉게 물들어 있는 창가를 뒤로 하고 차분히 앉아서 웃어 보이는 왕후의 모습이 괴상하리만치 서늘하고도 아름다워 보였다.

  반드시 살아남으세요, 세자.

  가까스로 왕후에게서 눈을 뗀 테츠야는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몸으로 달렸다. 앞서 달리는 세이쥬로는 그의 손을 꼭 붙잡아 이끌었다. 카게도라는 두 아이를 왕궁의 남쪽 문으로 인도했다. 목적지에 이르기 전 전각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는 아이들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소매 속에서 수수하면서도 정교한 노리개 하나를 꺼내 건넸다.

  "궁남문으로 나가면 곧장 서쪽으로 달리십시오. 그곳에 양천각이라 하는 곳이 나올 것입니다. 그곳에서 마사코라는 사람을 찾으십시오. 필시 도움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 말만을 남긴 채 카게도라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세이쥬로와 테츠야는 그대로 궁남문을 향해 달렸다. 한 살이라는 나이의 차이 때문인지 세이쥬로보다 한참 체격도 작고 약했던 테츠야는 조금씩 뒤쳐졌지만 세이쥬로는 그의 손을 놓지 않고 계속 달렸다. 

  "저기다!"

  궁남문이 눈에 들어오던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불길의 영역을 피해 그림자만을 골라 움직였어도 아이들은 곧 반란군의 눈에 띄고 만 것이었다.

  군사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점점 더 많아졌다. 그럼에도 세이쥬로와 테츠야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앞서 달리던 세이쥬로가 궁남문의 문턱을 넘으려던 순간.

  "헉!"

  중궁전을 나서는 순간부터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던 테츠야의 손이 그대로 빠져나갔다. 놀란 세이쥬로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았다.

  땅에 엎어진 테츠야의 등에 작은 비수 하나가 꽂혀 있었다. 어른의 손 하나 정도의 길이였지만 테츠야의 작은 체구에는 한없이 커 보였다. 세이쥬로가 황급히 테츠야에게 달려갔다. 테츠야는 몸을 일으키려는 듯 팔로 땅을 짚었다.

  그의 온몸이 떨려왔다. 도망쳐야 했다. 일어서서 달려야 했다. 앞에는 불지옥이 되어 버린, 한 때는 집이나 마찬가지였던 곳을 나가는 문이 보였고 뒤에서는 지옥문을 지키는 개보다도 더 사납고 재빠른 추격자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도망쳐야 했다. 살아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눈앞이 흐려지는 것일까.

  



(3) 양천각. 그곳은 테이코 왕국의 수도 홍경(紅京)에서 가장 번화한 향락가의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기방이었다. 빼어난 미모, 뛰어난 지성. 아름답고 이지적인 꽃이었지만 누구에게나 그 향을 내주지 않는 냉정하고 굳은 심지. 그것이 많은 대가집 자제들이 마사코라는 이름을 찾아 발걸음을 끊이지 않게 하는 미혹이었고 모든 것을 잃고 밑바닥을 기던 여인이 하나의 기방을 운영하는 방주의 자리까지 오르게 한 힘이었다.

  그날 저녁 양천각을 비롯한 기생집들에서는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장신구와 화장품들을 꺼내 단장을 하며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는 여인들의 목소리가 방마다 들려오고 있는 때에 기방 시종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불러왔다.

  "방주 어른! 방주 어른!"

  마사코가 가만히 방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감정을 결여한 듯 차분히 내려다보는 눈으로 그녀가 물었다. 시종은 주위를 살폈다. 그 모습을 본 마사코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눈짓으로 그를 방 안으로 들였다.

  "무슨 일이기에 그러는 것이냐."

  목소리를 한껏 낮춘 시종은 대답했다.

  "궐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한 시진 정도 전부터 안에서 불길과 연기가 보이는 것 같더니 사람들이 무더기로 몰려 들어갔다 합니다."

  마사코는 가만히 앉아서 그의 말을 들었다. 궁에 불이 나서 진화를 위해 외부의 인력을 동8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사람들도 불이 나서 그걸 끄러 가는 건가 했는데 조금 지나자 연기가 더욱 심해졌답니다. 그리고 지금은 무장한 사병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궐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제야 마사코의 얼굴 역시 굳어갔다.

  "사병이라니?"

  "이 나라에서 사병이 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그 말은 사적으로 모집한 반란군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사코가 무언가 말하려는 틈에 문 밖에서 리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그리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리코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창고, 창고에- 창고에 가 보셔요!"

  평소 총명하고 밝으면서도 필요 이상으로 수선을 떨지 않는 아이가 다급하게 더듬거리자 마사코의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반란으로 의심되는 소식에 이어 리코가 당황할만한 일까지. 무언가 범상치 않은 것이 그녀를 향해 덮쳐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발걸음을 서둘러 리코를 따라 이른 곳은 양천각의 각종 물품들을 보관하는 창고였다. 이제 갓 열 살을 넘긴 소녀는 마사코를 창고의 가장 깊숙한 곳, 그림자에 싸인 가장 어두운 구석으로 이끌었다. 

  그 색조차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짙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두 눈이 마사코를 올려다보았다.

  "부탁합니다. 잠시만, 잠시만 이곳에 있게 해 주십시오."

  낯설지 않은 눈빛. 친숙한 듯도 한 눈빛. 그러나 너무도 아프게 찌르는 눈빛.

  마사코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무정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절박한 아이를 내려보았다. 달도 뜨지 않는 밤 속에 아이의 모습은 희미한 윤곽에 지나지 않았다. 아이의 곁에는 자신보다도 더 작은 몸집의 다른 아이 하나가 더 있었다. 그 작은 아이의 몸을 끌어안은 아이의 손은 숨을 몰아쉬는 작은 아이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마사코는 한눈에 작은 아이가 의식조차 제대로 붙잡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궁에서의 난리. 열 살도 되지 않은 남자아이. 

  운명이라는 것은 참으로 너무하구나.

  "네가 무엇이기에 내 너를 고발하지 않는단 말이냐."

  마사코가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는 다급하게 답했다.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그저 두 시진, 아니 한 시진만이라도 이곳에 있게 해 주십시오."

  "네가 이곳에 있는 것 자체가 폐를 끼치는 것이다."

  그녀의 날카로운 답에 아이는 움찔 입을 다물었다.

  마사코는 가만히 두 아이들을 보았다. 살고자 하는 눈을 가진 하나와 다 죽어가는 하나. 

  정말 너무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아이들을 제게 보내셨습니까. 어쩌자고 이 아이들을 이곳에 떨어뜨리셨습니까.

  말없이 서 있던 그녀는 몸에 지니고 있던 은장도를 꺼내 아이를 향해 던졌다. 경계와 두려움, 간절함이 뒤섞인 눈이 자신의 앞에 작은 충돌음을 내며 떨어진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도 살기를 바란다면 기회를 주마."

  마사코가 차갑게 말했다.

  "그것으로 그 아이의 숨을 끊어라."

  그녀를 보던 아이의 눈이 커졌다.

  "어머니!"

  리코가 작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마사코는 흔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다 죽은 목숨이 아니냐. 나는 둘 모두를 도울 수 없으니 그 아이를 처리한다면 네 목숨 하나 정도는 거둬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아이는 허망한 눈으로 마사코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이기는 했으나 원망과 분노가 그녀를 찔렀다. 그러다가 그 눈이 곧 제 품에 기대 거친 숨만 쉬는 작은 아이와 은장도를 번갈아 보았다. 곧 작은 아이를 잡지 않은 손이 천천히 뻗어나와 칼을 잡았다. 깊이 심호흡을 하며 날을 칼집에서 빼내는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해 보여 괴이하고 소름이 돋았다.

  그래. 결국 너도 네 목숨이 소중하겠지.

  마사코는 냉소도 짓지 않았다. 인간의 잔혹성. 이기심. 그런 것이라면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어린 아이일지라도 하나의 인간. 아니 어쩌면 어리기 때문에 더욱 본능과 감정에 충실할 것이었다.

  아이는 천천히 은장도를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쉰 다음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작은 칼날이 아래쪽으로 내리찍었다.

  "꺄악!"

  어린 리코는 주체를 하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멈춰!"

   마사코 역시 저도 모르는 사이 외치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황급히 손을 뻗어 아이의 얇은 손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칼날은 이미 아이의 한쪽 눈을 가로질러 살을 베고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처음으로 흔들리고 무너져 내린 듯한 모습이었다. 충격으로 일그러진 표정이 아이의 상처입은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이는 제 손으로 눈을 벤 고통을 억누르며 눈물도 흐르지 않는 강인한 눈빛으로 마사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의 눈빛이, 나의 태도가 그대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내 눈을 드려서라도 사죄하겠습니다. 허나 내 손으로 이 아이의 목숨을 거두라는 것은 시키지 말아주십시오. 이 아이는 살아야 합니다. 저와 이 아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사코는 아이의 팔을 붙잡은 채로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의 표정도 점점 회복되어 안정을 찾았다. 그녀는 아이의 손에서 은장도를 빼냈다. 날에 옅게 맺혀 있는 붉은 액체 방울을 물끄러미 보던 그녀가 등 뒤에서 제 입을 틀어막고 떨고 있는 여자아이에게 말했다.

  "리코. 가서 의원을 모셔 오거라. 최대한 은밀해야 한다."

  "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한 리코는 잠시 멍하니 아이들과 마사코를 바라보다가 급히 뛰쳐나갔다.

  마사코는 손에 든 은장도를 바라보다가 곧 조용히, 그러나 재빠르게 자신의 손을 베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조금의 미동이나 고통의 흔적도 없었다.

  "뭘 하는 겁니까!"

  아이가 당황한 듯 소리쳤다. 하지만 마사코는 아무렇지 않거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칼날을 닦고 상처를 싸맸다. 그리고 가쁘게 숨을 쉬는 작은 아이의 곁에 떨어져 있던 노리개를 발견하고 그것을 주웠다.

  "송구하오나 그것은-"

  "제 것이지요. 이것을 가지고 계신 것을 보아하니 저를찾아오신 것 같습니다만."

  아이가 멍하니 그녀를 보자 그녀가 덧붙였다.

  "마사코라고 합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사람을 불러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이로부터 어떤 말을 듣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돌아서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4) 테이코 127년. 성군이었던 명정왕의 죽음을 기점으로 일어난 회빈(灰嬪)의 난. 수많은 대신들과 궁중 인물들의 피로 왕궁을 물들인 이 밤은 그렇게 정안왕후와 세자를 삼켰다. 그리고 그 끝에 아침이 왔을 때 테이코에는 새로운 태양이 떠올라 있었다.

  이제 막 열 살이 된 잿빛 태양이.

  그리고 10년이란 시간이 흘러 테이코 137년.

  "도와주세요!"

  멈춰 있던 그들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는 소리가 홍경의 길거리에서 터져나왔다.

  



(5) 홍경은 한 나라의 수도답게 사람도 일도 탈도 많은 곳이었다. 온갖 배경과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 거리는 낮에는 각종 일과 업무로 북적였고 밤이면 유흥과 여유를 즐기려는 이들로 활기가 넘쳤다.

  그리고 그것은 정월 대보름 밤에 가장 만개하곤 했다. 새해 처음으로 맞는 보름달의 밤은 한 해의 풍요로운 시작을 기리는 날이었기에 가장 행복하고 밝게 보내는 것이 테이코의 풍습이었다.

  물론 그 중에는 종종 지나치게 즐기려는 사람이 나오곤 했다.

  "놓으시오!"

  날카로운 목소리가 길 한복판에서 외치자 사람들의 이목이 모두 집중되었다. 분홍머리를 틀어올린 한 사람이 키가 큰 사내에게 붙잡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분 잡쳐 놓고 보상도 안하고 그냥 가려고?"

  그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것은 화려하게 차려입은 청년이었다. 외양만 슬쩍 보아도 높은 집안의 도련님이 분명했고 그의 거만하고 무례한 행동은 그가 그 권세를 얼마나 자부하고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분홍 머리의 사람은 애써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소? 내 지금은 가진 돈이 없으니 보상을 받고 싶다면 다음에-"

  "누굴 속이려고?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여?"

  "속이는 게 아니오. 내 지금은 정말로 돈이 없어서 그러니 다음, 아 내일이라도 이곳에서 다시 만나 보상할 돈을 드리겠소."

  그 말이 청년에게 먹힐 리는 없었다.

  "누구를 천치 호구로 아나. 돈은 돈이고 오늘 망친 기분이랑 시간은 어쩔 건데?"

  분홍빛 머리를 한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청년이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핏줄이 불거졌다. 그 때 청년의 시종으로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

  "도련님, 이거 지금 보니 사내가 아니라 계집인 것 같습니다."

  그 한 마디에 청년의 눈빛이 바뀌었다. 분홍 머리의 사람 역시 이 상황을 예상치 못한 눈치였다. 그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곱상하게 생겼다 했더니 역시 그런 거였어?"

  "저…."

  난처한 얼굴을 짓던 그가 붙잡힌 손목을 빼내려 더욱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청년은 그런 그를 확 끌어당겼다.

  "얼굴은 반반한 게 나쁘지 않단 말이지. 좋다. 돈은 필요 없으니 오늘 기방에 못 간 대신 네가 좀 놀아줘야겠다."

  "그게 무슨-"

  그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청년은 그를 잡아끌기 시작했다. 그 갑작스런 움직임에 분홍 머리의 여인은 외마디 비명만 지를 뿐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했다. 

  "이 몸이 놀아주는 걸 영광으로 생각해."

  청년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여인은 발버둥을 쳤지만 그대로 끌려가고 있었다.

  "이거 놓으시오! 놓으란 말이 안 들리시오?"

  청년의 손에 꽉 붙잡힌 오른손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웠던 왼손은 청년의 손을 뿌리쳐 보다가 전혀 소용이 없자 곧 주변의 사람들을 향해 휘젓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수군거리고 얼굴을 찌푸리며 상황을 지켜보았지만 그 누구 하나 나서서 도우려는 사람은 없었다. 다급한 여인은 결국 목적지 없이 터져 나오는 외침을 시작했다.

  "도와주세요!"

  "아, 시끄러워!"

  청년과 여인으로부터 몇 발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목소리를 높였다. 새로운 사람의 개입에 구경꾼들의 시선이 모두 길거리 노름판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던 날카롭고 준수하게 생긴 청년에게로 돌아갔다. 청년은 주변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노름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탁자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작지 않은 길거리에 정적이 찾아오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자 그는 눈만 슬쩍 움직여 청년과 여인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 역시 새로운 청년의 목소리에 그대로 굳어 있었다. 하지만 여인은 곧 정신을 차리고 노름판의 청년을 향해 애걸하기 시작했다.

  "나으리, 저 좀 도와주세요!"

  노름판 청년은 한 손으로 턱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담뱃대를 든 채 여인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여인의 절박한 몸짓과는 달리 그는 가만히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보인 단 하나의 움직임은 그저 눈을 다시 자신의 앞에 놓인 노름판으로 돌린 것 뿐이었다. 단 하나의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철저하게 외면을 당한 여인의 얼굴에는 충격이 내려앉았다.

  "흥, 그래. 감히 누가 이 몸에게 대들겠어?"

  여인을 붙잡은 청년이 큰 소리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리고 다시 여인을 끌고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잘 걷던 그가 갑자기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에 밀리기라도 한 듯 뒤로 대차게 넘어졌다. 그가 손목을 꽉 붙잡고 있던 터라 분홍 머리의 여인도 함께 이끌려 넘어졌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한 여인이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나리."

  중저음의 차분한 목소리가 말했다. 내용과는 달리 그 어떤 후회나 사죄의 감정도 들어있지 않았다.

  "하는 짓이 시정 잡배나 다름없어서 어디서 굴러먹던 날강도인 줄 알았습니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여인은 은은하면서도 강단이 있는 아름다움과 더불어 어딘가 기묘하기도 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머리카락의 반은 틀어올린 뒤 은방울꽃을 연상시키는 청초한 장신구를 꽂아 두었고 나머지는 그녀의 등을 덮고 허리까지 내려오도록 가지런히 늘어뜨렸다. 화려하거나 고급지지는 않은 옷은 일개 백성들의 것처럼 거칠고 해지지도 않았다. 신분으로만 본다면 그리 높은 사람은 아닌 것이 분명했지만 꼿꼿하게 서서 귀한 집의 도련님을 내려다보는 그 순간에는 그 누구보다 높고 고고한 존재로 보이도록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뭐야?"

  소리치는 청년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당황이 뒤섞여 있었다. 분홍 머리의 여인 역시 깜짝 놀란 듯 앉은 채로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머리의 여인은 어느새 부채를 펴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녀가 말로 표현하지 않은 감정들이 여실히 드러났다. 분노. 경멸. 무시. 파랗기에 더욱 차가워 보이는 눈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뭐야?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이래?"

  청년이 분에 차서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이 홍경에서 나으리를 모르는 이가 있겠습니까. 해상국 모리야마 가의 둘째 도련님이신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여인은 차분하고 담백하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다가 풋 코웃음을 쳤다.

  "모리야마 가의 자제분들은 미색을 즐기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기는 하오나 이리 무례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사촌이신 요시타카 도련님은 점잖고 교양을 갖춘 분으로 예와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아시는 분인데 참으로 비교가 되는군요. 실망스럽습니다. 그 분이 왜 그리도 아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됩니다."

  '요시타카'라는 이름은 청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약점인 듯했다. 여인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다 못해 폭발하기 직전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 천것이 감히 누구를 모욕하려 드는 것이냐!"

  그가 발끈하여 소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키가 훤칠히 큰 청년의 몸집에 비해 여인은 가냘파 보였지만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녀의 기세는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예. 말씀하신대로 천것입니다. 허나 그러한 천것도 고귀하신 도련님과 마찬가지로 사람이지요. 그리고 사람에게는 마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타고난 신분이 아무리 천하다 하나 같은 사람이기에 마땅히 해야 하는 도리라는 것이 있는 법입니다."

  역정을 내는 청년과 상반되도록 조용하고 담담한 그녀의 어조는 차분하기 때문에 더욱 날카로웠다.

  "저희 같은 천것도 마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높으신 분이 아무리 많은 부와 정을 주신다고 해도 사람을 가벼이 여기는 분을 반기는 이는 없습니다."

  말문이 막힌 청년은 그저 분에 가득찬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런 말은 하지 못하고 손을 쳐들어 세차게 휘둘렀다.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손에 부딪힌 여인의 얼굴이 옆으로 홱 젖혀졌다. 지켜보는 군중에게서 놀라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네 년이 감히 누구에게 그런 망발을 하는 것이냐!"

  여인은 천천히 다시 고개를 돌려 청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으로 변하지 않는 표정과 싸늘한 눈빛이 더욱 그녀의 강인함과 보이지 않는 감정을 부각하는 것 같았다.

  "높고 낮음을 따지기 전에 우선 도리부터 제대로 익히시고 사람부터 되시지요."

  청년은 다시 한 번 팔을 휘두르려 했다.

  "하하하하하하하!"

  공중으로 높이 쳐든 팔은 갑자기 터져나온 웃음소리에 그대로 멈춰서고 말았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노름판 청년에게 향했다. 무엇이 우스운지 그는 고개를 젖혀가며 크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틀린 소리 하나 없네. 망발은 그 쪽이 한 게 망발이지."

  "뭐?"

  이미 쌓일대로 쌓인 모리야마 청년의 분노가 그에게로 향했다.

  "이것들이 감히!"

  그가 노름판 청년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의 주의가 그곳으로 돌아간 틈을 타서 검은 머리의 여인은 분홍 머리의 여인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괜찮으십니까?"

  분홍 머리의 여인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검은 머리의 여인이 그녀의 손을 붙잡고 사람들 틈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가시지요."

  "허, 허나 저 사람은…."

  그녀는 곧장이라도 싸움이 벌어질 듯한 두 청년을 향해 돌아보았다. 노름판 청년은 멱살을 붙잡힌 채로 일으켜 세워져서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잡은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의 여인은 앞만을 본 채로 말했다.

  "괜찮을 것입니다. 우선 몸부터 피하시지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일행을 이끌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 인적이 끊긴 곳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자신이 붙잡았던 손을 놓아주었다. 그녀가 마침내 돌아서서 분홍 머리의 여인을 마주보았다.

  "이쯤 되면 안전할 것입니다. 바로 댁으로 돌아가시지요."

  검은 머리의 여인은 고개를 한 차례 숙여 인사를 표한 뒤 돌아섰다.

  "저… 잠깐!"

  분홍 머리의 여인이 더듬거리며 그녀를 불러세웠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지만 돌아서지는 않았다.

  "고마웠습니다. 저는 모모이 가의 사츠키라고 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사츠키라는 이름의 여인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검은 머리의 여인은 고개만 반쯤 돌린 채 말했다.

  "아까 말했다시피 신분이 미천하여 아씨께서 이름을 아실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차분하게, 그리고 매우 단호하게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츠키는 그런 그녀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만 바라보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6) 쿠로코(クロコ)는 북적이는 대로에서 벗어나 골목 한쪽으로 들어갔다. 건물과 나무, 구름의 그림자에 어둡게 가려진 곳에서 사내 하나가 걸어 나와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에 붙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말 한 마디, 눈빛 한 번의 교환도 없었지만 처음부터 단 한 순간도 떨어진 적이 없었던 듯 자연스러웠다.

  "꽤나 시끌벅적했네요."

  사내가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달빛에 드러난 그의 키는 매우 커서 그가 어떻게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숨어 있었는지 의문을 불러 일으킬 법도 했다. 그가 일반적인 신장이었던 쿠로코의 옆에 서자 부쩍 더 커 보였다.

  "세이쥬로 님이 아시면 또 한 소리 들을 것 같습니다."

  그가 하하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쿠로코는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다 해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역시 그렇지요?"

  사내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양천각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쿠로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야지요. 이만큼 축제를 즐겼으니 됐습니다. 미부치 씨에게서 온 다른 기별은 없었지요?"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없었습니다. 아마 예정대로 돌아오실 겁니다."

  쿠로코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그 뒤로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내가 갑자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사람은 도와주는 편이 낫지 않았습니까?"

  쿠로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사람 역시 그림자를 달고 있었으니 괜찮을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자른 그녀는 생각에 잠긴듯 했다. 잠시 후, 그녀는 나지막이 덧붙였다.

  "어딘가 위험한 냄새가 나는 이였습니다."




(7) 열 아홉. 테이코 왕국 군주의 나이였다. 군주로서는 매우 젊은 나이였지만 그는 그 해로 벌써 10년째 왕위에 올라 있었다.

  갓 열 번째 생일이 지난 후 그는 왕으로 즉위했다. 어린 그가 한밤중에 나인의 손에 잠에서 깨어 보니 아버지는 병으로 세상을 떴고 어머니는 왕궁에 군사를 불러들인 상황 한가운데였다. 잠결에 영문도 모른 채로 홍염당에 갇혀 닫힌 창문 너머로 보이는 붉은 화염과 아득한 비명 소리를 막아내고자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았다. 밤의 어둠과 함께 그 모든 것이 지나고 동이 트기 시작했을 때 그의 어머니인 회빈이 그에게 옥새를 건넸다.

  어린 나이였지만 알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혈흔이 눈앞에 벌겋게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향낭의 짙은 냄새 속에 피비린내가 섞여 있는 것만 같았다. 용상에 올라 앉아 내려다보이는 신하들이 평화와 만수무강을 외쳤지만 그 소리가 참으로 듣기 싫었다. 머리에 쓴 관이 너무도 무거워 벗어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보고 말았다. 처음으로 진정한 미소를 띤 어머니의 얼굴을. 처음으로 자랑스럽고 안정된 모습으로 웃어주는 어머니를.

  그것이 그가 지금껏 허울뿐인 왕의 자리를 내려놓지 않고 버틴 단 하나의 이유였다.

  그리고 그것이 매일 아침 편전에서 사방에 개가 짖는 마냥 저들끼리 떠들어대는 목소리들을 참고 견뎌내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였다.

  전국적으로 들끓는다는 강도의 소식과 지역마다 거둬들이는 조세에 대한 이야기. 백성이 이렇고 백성이 저렇고. 민심을 돌보아라 하는 식의 이야기.

  쇼고는 코웃음을 쳤다. 백날 민심이고 백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 봤자 그 '민심'이라는 것은 결국 저들의 마음을 뜻하는 것이었으니까. 명색이 왕이었지만 어차피 쇼고의 의견 따위는 아무런 힘도 의미도 없었다.

  "전하, 부디 통촉하시고 민심을 돌보시어-"

  "그러니 경들이 알아서 하라고."

  장황한 언변을 늘어놓던 대신의 말을 뚝 끊고 쇼고가 귀찮다는 투로 쏘아붙였다. 대신들은 눈치를 보는 마냥 왕을 흘긋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쇼고는 가증스러워서 우스워질 지경이었다.

  "알아서 다 처리하시오. 이런 회의 같은 것이 무슨 소용이야? 이딴 거나 하고 있을 시간에 가서 알아서 처리하란 말이오."

  침이 튀어라 말을 늘어놓던 대신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하오나 전하, 이 나라의 어버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전하십니다. 이제는 대비마마의 대리청정도 물리셨으니 전하께서 국사를 정하심이 합당하다 사료되옵니다."

  용상 한쪽 팔걸이에 팔꿈치를 괴고 턱을 받쳐든 채 비스듬히 앉아있던 쇼고가 삐딱한 시선으로 대소신료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 누가 뭐라고 해도 이 나라의 왕은 과인이오. 그러니 내가 정하면 되는 것이겠지."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내가 아니 된다고 하면 그럴 참이오?"

  대신들은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다. 하지만 쇼고의 눈에는 그들이 서로에게 눈짓을 하며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이 훤히 보였다.

  "하오나 전하,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이는-"

  "하. 이거 보시오. 어차피 과인이 무슨 말을 하든 바로 반박부터 들어오잖아."

  다시 한 번 자신의 주장을 늘어놓으려던 대신은 입을 다물었다. 쇼고는 용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니 알아서들 처리하란 말이오. 알아듣겠소?"

  그리고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로 용상에서 내려와 편전의 측면 문을 통해 나갔다.

  편전을 나선 쇼고는 그대로 멈추지 않고 곧장 휘영전 전각으로 향했다. 궁의 담장 너머 홍경 저자거리의 모습이 가장 잘 보이는 그곳은 쇼고가 궁궐 내에서 가장 자주 찾는 곳이자 그의 자유분방한 호위무사가 있는 곳이었다.

  "시킨 건 알아 보았느냐?"

  쇼고의 물음에 전각의 난간에 걸터 앉아 있던 하나미야 마코토가 코웃음을 쳤다. 쇼고의 뒤에 있던 시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양천각 기생 쿠로코라 합디다."

  양천각. 기생이라.

  쇼고가 가만히 그 답을 되뇌었다. 저잣거리에서의 기억이 떠오르며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에 다시 그려졌다.

  그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하나미야가 덧붙였다.

  "그것도 동기(童妓)라지요."

  무슨 말을 해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쇼고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하나미야를 쳐다보았다.

  "동기? 그 아이가 동기란 말이냐?"

  하나미야가 한 번 더 피식 웃었다.

  "우리 전하께서 드디어 여색에 눈이 뜨이셨나. 그렇게나 좋으신가 봅니다?"

  "네 이놈, 어느 안전에 대고 그런 무엄한 말을 하느냐! 전하께 예를 갖추지 못하겠느냐!"

  시종이 호통을 치자 하나미야가 느릿하게 눈을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그쪽이나 말조심하지? 그러다가 내 '실수'로 전하의 목숨이 위험해지면 어쩌려고?"

  그의 말에 시종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네놈이 감히!"

  "시끄러워."

  쇼고가 시종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러자 시종은 가만히 입을 닫고 고개만 숙였다. 그 뒤 쇼고의 시선은 하나미야에게도 한 차례 옮겨갔다. 하나미야는 어꺠를 으쓱하고 팔짱을 꼈다.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정말로 죽게 두지는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서 죽어봤자 이 몸에게 득이 될 건 하나도 없으니까."

  쇼고는 코웃음을 내뱉었다. 하나미야가 난간에서 사뿐히 뛰어내려 쇼고의 뒤에 섰다.

  "얼굴은 제법 반반하기는 하지만 특별히 뛰어난 것 같지는 않고. 맹랑하긴 한게 전하와 같이 있으면 참 볼만 할 것 같긴 합디다."

  쇼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나미야는 쇼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시종의 잔뜩 찌푸린 얼굴은 철저히 무시를 당했다.

  "그런데도 꽤나 찾는 녀석들은 많은 것 같습니다. 키세 가의 도련님은 매일 하루에 몇 번씩은 드나들어 찾는다고 하고 아오미네 집안 도련님도 자주 들른다나."

  쇼고에게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나미야가 또 한 차례 코웃음을 쳤다.

  "꽤나 경쟁자가 많을 것 같습니다, 전하?"

  "닥쳐."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나지막이 말하는 쇼고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제 스스로도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8) 모모이 사츠키는 찻잔을 꽉 쥐었다. 그녀는 잔의 내용물을 자신의 앞에 앉은 사내에게 확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듣고 있는 거야, 다이 쨩?"

  바닥에 반쯤 누운 자세로 책에 눈을 고정한 청년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예에, 예. 듣고 있습니다."

  모모이가 부들부들 떨었다.

  "그딴 저속한 건 너네 집에나 가서 봐!"

  그녀가 홱 화를 내고야 말았다. 아오미네는 시선만 돌려서 그녀를 보았다.

  "듣고 있다고. 어떤 싸가지 없는 놈한테서 어떤 여자가 도와줬다며?"

  모모이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누군지 좀 알아봐 줄 수 없냐는 말이야."

  "예쁘냐?"

  "진짜 한 대 확 때리고 싶다, 너."

  모모이가 가득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사건을 되돌리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치밀던 화가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분위기가 예뻤어. 무엇보다 진짜 진짜 멋있었다구!"

  "가슴은 크냐?"

  그리고 사라졌던 화는 다시 차오르다 못해 결국 모모이를 폭발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녀는 아오미네가 들고 있던 책을 확 빼앗아 집어 던졌다.

  "뭐 하는 거야?"

  늘어져만 있던 아오미네가 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서둘러 책을 주워다가 이리저리 살폈다.

  "이게 얼마나 귀한 건 줄 알아?"

  "귀하기는 뭐가! 너는 도대체가 양반집 애가 이딴 거나 보고 있니? 그리고 여인에게 한다는 소리가 뭐? 뭐가 어째? 넌 진짜 아버님 얼굴에 먹칠할 생각밖에 없니?"

  아오미네가 인상을 팍 구겼다.

  "이게 진짜. 이젠 너까지 그러냐?"

  "한심해서 그런다, 한심해서! 홍경시부 판관이신 분의 아들이면 행동을 조심할 생각을 해야지!"

  아오미네는 짜증스럽게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아, 알았어! 도와줄 테니까 어떻게 생겼는지나 말해 봐."

  씩씩 화를 내던 모모이는 심호흡흘 해 감정을 가라앉혔다.

  "일단 머리는 짙은 게 검은색 아니면 너보다 짙은 남색 같은 느낌이었구, 눈은… 파란색? 키는 나랑 비슷했어. 마른 것 같았고 목소리는 꽤 낮은 편이었어."

  귀찮다는 얼굴로 듣고 있던 아오미네의 표정이 저도 모르는 사이 굳어갔다.

  "뭐? 그거 설마…."




(9) 쿠로코는 양천각 내 작은 호수 중앙에 있는 누각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작지만 여러 색의 꽃이 어우러져 소박한 아름다움을 가진 호수의 경치를 바라보는 눈은 복잡한 사색들로 초점이 없이 흐릿해져 있었다.

  "제가 없는 사이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쿠로코가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붉은 머리에 왼쪽 눈에 안대를 한 청년이 누각의 입구에 서 있었다.

  "아카시 군."

  쿠로코가 말했다.

  아카시 세이쥬로가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그리고는 그녀가 앉은 탁자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일은 잘 마무리하고 왔겠지요."

  "예."

  "세이린산 쪽도 준비는 거의 마쳤습니다."

  "예."

  그의 대답에 쿠로코가 아득한 눈빛으로 다시 호수의 경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정말 멀지 않았습니다."

  상대를 향한 말이라기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세이쥬로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닙니다."

  쿠로코가 부드럽게 답했다.

  "쿠로코 님."

  "정말입니다. 무슨 근심이 있겠습니까. 그저 새삼… 지난 일들이 생각났을 뿐입니다."

  그녀의 말에 세이쥬로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쿠로코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한 것처럼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나갔다 와야겠습니다."

  세이쥬로는 수긍하듯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산채에 가십니까?"

  쿠로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누각에서 내려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화방에 들렀다가 산채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그녀의 뒤에 그림자처럼 따르는 세이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조심하십시오."

  쿠로코가 희미하게 웃었다.

  "물론입니다."

  두 사람은 쿠로코의 방에 이르렀다. 세이쥬로는 문을 등지고 그 앞 기둥에 몸을 기댔다. 쿠로코는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쿠로코는 살포시 겉옷을 벗어내렸다. 그리고 면경 앞에 앉아 얼굴의 화장을 깨끗이 지워냈다. 하얀 원래의 피부가 드러난 후에 빗을 들어 머리카락을 사락 빗어 내리던 손은 곧 멈추더니 이마 부분의 머리를 붙잡았다. 천천히 잡아당기자 검은 머리칼이 조금씩 들어져 나왔다. 잠시 뒤 검은 머리칼은 한 뭉치가 되어 손에 들려 있었고 그것이 있던 곳에는 투명한 하늘빛의 머리카락이 자리를 대신했다. 벗겨낸 머리카락 다발을 늘 보관하는 함에 잘 넣은 그는 옷고름을 풀고 저고리부터 벗었다. 속옷까지 벗겨내자 가녀린 여인의 몸이 아닌 사소한 상처들과 잔근육이 가득한 사내의 맨살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것은 곧 새로 꺼낸 저고리 속으로 다시 모습을 감췄다. 비단결의 우아한 치마는 다소 거친 천으로 만든 바지로 교체되었다.

  그가 다시 면경을 들여다보았을 때는 쿠로코 테츠야(黒子 テツヤ )가 그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 한 구석에 기대 있는 낡은 화구통을 들어 어깨에 멨다. 그리고는 방문을 나와 여전히 같은 자세로 기둥에 기대 서 있는 세이쥬로를 지나쳤다.

  "다녀오십시오, 테츠야 님."

  "네."

  테츠야는 짧은 대답만 남기며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양천각의 뒷문으로 향했다.

  



(10) 기명(妓名) 쿠로코(クロコ). 하얀 피부와 검은 머리에 투명한 파란 눈으로 맑고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지성을 갖춰 홍경에서 제일가는 미인 중 하나로 꼽히는 양천각의 기생. 양반가의 젊은 자제들은 쿠로코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온갖 허세와 구애를 보였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는 없었다.

  "아무리 높으신 분이라 하여도 아무리 많은 재물을 주셔도 소용이 없습니다."

  쇼고는 병째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화가 나기보다는 웃음이 나왔다.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 것이었을까. 천한 기생인 주제에 감히 귀한 도련님을, 그것도 사실을 몰랐다지만 이 나라의 지존을 매몰차게 거절하는 그 맹랑함? 천하에서 우러를 것이 없이 가장 높은 자리에서 모두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앉아서는 한낱 계집에게 단칼에 내쫓긴 자신의 처지? 그것도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기쁨과 흥미가 생긴 것이었을까?

  매일같이 궁을 나와 신분을 숨기고 저자거리에 숨어드는 그였지만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다닌 적은 없었다. 꽤 인기 있는 기생이라 하니 아무리 못해도 웬만한 대규모 기방의 제일가는 여인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은 챙겨야겠거니. 그런 생각으로 주머니가 묵직하게 동전을 채워 양천각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곧장 그 아이의 방으로 안내받기는커녕 마당에서 몇 분이나 서서 기다린 뒤에야 슬쩍 얼굴을 비친 그녀를 마주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녀는 만족은 둘째 치고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기색으로 돈을 내려다보던 차갑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그 정도면 술 한 병은 내어 드릴 수 있겠군요."

  한 마디를 남긴 그녀는 다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고 그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는 쇼고에게 남겨진 건 기방 시종이 내준 술 한 병 뿐이었다. 그 이상으로는 환영을 받지 못하는 몸이 된 그는 할 수 있는 일도 내놓을 수 있는 말도 하나 없이 그대로 돌아서서 문을 나서야 했다.

  그는 등 뒤로 양천각 대문이 닫히자마자 손에 들린 술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그는 큰 소리로 소리를 내어 웃기 시작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런 건 조금도 상관이 없었다. 

  쇼고는 늘 무언가를 쉽게 손에 넣어 왔다. 왕실에 태어났기 때문에. 태생부터 높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이 나라의 주인으로 올라섰기 때문에. 그 왕위조차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니었음에도, 스스로 그곳에 오르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냥 제 손 안에 떨어졌다.

  그랬던 그가 단 한 순간의 망설임이나 어려움도 없이 매몰차게 거절을 당한 것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느껴지는 것은 화가 아니라 흥미라니. 

  "우리 전하께서 여자한테 차여서 충격이 크셨나. 벌써부터 맛이 가면 쓰겠습니까."

  양천각 옆 골목에서 나타난 하나미야가 말했다. 쇼고는 그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웃는 얼굴로 손에 들린 술병을 보다가 양천각 대문 위에 달린 문패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봤자 기생인 주제에 참으로 고상하게도 구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술을 병째 입에 대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름을 알지 못할 술은 약간의 단맛과 씁쓸함이 섞여 있었고 마지막에는 꽃에서 날 법한 향긋함이 감돌았다. 쇼고는 다시 한 번 웃었다.

  "누가 준 술 아니랄까봐 맛도 딱 자기같군."

  하나미야는 양천각 담장에 기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아마 오늘은 완패인 것 같은데 돌아나 가시죠."

  쇼고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박을 하며 고집을 부릴 것 같은 분위기도 아니었다. 다시 한 번 술을 크게 들이킨 그는 곧 한숨을 길게 내뱉고는 돌아서서 거리로 섞여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만연했다.

  하나미야는 그 모습을 확인하고 다시 골목 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11) 본래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것에 끌리곤 했다. 미지(未知)라는 것은 그 불확실성에 의해 두려움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어둠 속에 숨어 모습이 보이지 않는 불명의 것에 빛을 비추고 싶은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같은 것, 평범해 보이는 것조차도 그 뒤에 무언가 비밀스런 어떤 것이 숨어있다는 것만으로도 더욱 특별함을 가지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시작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여느 시전의 화공들이나 다름 없이 무명의 젊은이로 시작해 풍경을 그린 그림을 팔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붓놀림이 색다른 것도 아니었고 눈에 띄게 화려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소재가 다른 이들의 그림에서는 볼 수 없는 곳의 풍경이었기에 그의 그림을 알아주는 이가 늘기 시작했던 것 뿐. 그리고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 눈에 띄기 시작한 뒤에야 사람들은 그에 대해 부가적인 가치들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절제된 붓질이라든가, 소박하고 청명한 아름다움이라든가.

  그 그림이 특별히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데에는 그것을 그린 이가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점 역시 큰 역할을 했다. 이름은 커녕 어떻게 생긴 이인지 어디에서 온 이인지. 화가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그가 그림마다 남겨놓은 '영(影)'이라는 한 글자 뿐.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그림자 화공'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오늘도 없나요?"

  화방의 앞머리에 내걸린 그림들을 훑어보던 모모이가 주인을 향해 물었다.

  "예에. 그 치가 아직 오질 않았습니다요."

  주인이 대답했다.

  "요즘 들어 부쩍 인기가 늘어난 것 같습니다. 아가씨처럼 맨날 와서 찾는 사람도 있고 예약까지 걸어놓고 가신 분들도 있습죠."

  "뭔가 특별한 거라도 있는 거야? 이거나 그거나 무슨 차이인데?"

  한켠에서 뚱한 표정으로 화집을 스르륵 넘겨보던 아오미네가 벽 한쪽에 걸린 풍경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흥, 넌 어차피 저속한 것밖에 모르잖아, 변태."

  모모이가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곧 추억에 젖어들 듯 아련한 눈빛을 띠었다.

  "그 풍경이 참 예쁘거든. 너 같은 건 죽었다 깨 나도 모를 거야. 그리고 그 사람은 꼭 거기만 그리는 게 어쩌면…. 어쩌면 뭔가 알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구."

  아오미네가 모모이를 잠시 쳐다보았다. 아련하고도 서글픈 듯한 얼굴이 영락 없이 기억 속 그 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포기 안 한 거냐."

  아오미네가 중얼거렸다. 모모이는 새침하게 그를 흘겨보았다.

  "당연하지! 내 첫사랑이라구!"

  아오미네가 손에 들었던 화집을 제자리에 턱 가볍게 던져 놓으며 눈썹만 씰룩이는 찰나에 화방 입구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

  모모이와 아오미네 모두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소리도 기척도 없이 나타난 어떤 사내 하나가 화방의 주인을 향해 말을 건넨 것이었다. 하늘빛 머리에 투명한 듯 하얀 피부를 가진 젊은 청년은 그 생김새 만으로도 투명하고 맑은 느낌을 주어 차분하고 조용한 것이 존재감을 더욱 지워내는 것 같았다.

  주인 역시 청년의 갑작스런 등장에 소란스럽게 야단을 피웠지만 얼굴을 알아보자 환한 표정으로 그를 반겼다.

  "아이구, 왔는가. 자, 이리 안쪽으로 들어오게나."

  다소 정신이 없게 청년을 안쪽 방으로 안내한 주인은 모모이와 아오미네에게 거듭 인사를 하며 청년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모모이와 아오미네는 모두 눈으로 두사람을 좇았다. 방문이 닫히자 모모이는 금세 관심을 거두고 화방을 나서려는 듯 돌아섰지만 아오미네는 여전히 닫힌 방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다이 쨩?"

  아오미네는 고정시킨 시선을 조금도 떼지 않고 말했다.

  "아니, 어딘가 분위기가 익다고 해야 하나."

  그가 중얼거리듯 한 말에 모모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닫힌 문 너머의 사람이 보일 리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순간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 기분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주 찰나의 순간 지나쳤던, 그것도 자체적으로 존재감이 낮은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떠올릴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정말 어디선가 본 탓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그런 의혹을 들었기 때문인지 왠지 그녀 역시도 낯선 기운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두 사람이 아무리 생각을 하고 의혹에 잠긴들 방 안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린 초면의 이에 대해 그 어떤 것도 확실한 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방문을 열어 제치고 확인을 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두 사람은 그저 풀지 못한 의문만을 품고 화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12) 절경으로 소문이 난 세이린 산은 도성인 홍경의 범위 내에 들어 있어 왕궁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그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왕실에서는 일찍이 그 영역을 그들의 소유로 지정하여 일반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해 왔다. 특히 선대왕은 그 곳을 즐겨 찾았던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10년 전 선대왕의 죽음과 왕궁 온 구석구석마다 피를 흘렸던 큰 정변이 있었던 이후 왕실에서는 이 곳을 까맣게 잊은 듯 단 한 번도 발길을 주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이 곳을 알지도 못했던 것처럼.

  그러니 왕실의 허를 찌르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가장 왕실과 가까우면서도 가장 의심하기 어려운 곳. 

  홍경 번화가를 향해 나 있어 산의 '앞'이라 여겨지며 출입구 역할을 하는  꽤 큰 오솔길의 시작 부분을 품은 산자락을 끼고 서쪽으로 돌아가다 보면 빽빽한 수풀 투성이인 영역이 시작되었다. 얼핏 보기에는 사람이 지나다닐 틈도 없는 것 같았지만 그 곳을 잘 살피다 보면 쉽게는 알아볼 수 없이 미약하면서도 확실한 틈샛길이 있었다. 한 사람 정도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법한 작은 길을 따라가면 나무와 풀은 점점 사라지고 울퉁불퉁하고 거대한 바위들이 하나 둘 씩 보이기 시작했다. 사방은 비교적 낮지만 가파른 절벽들만이 보였고 그 안에 갇힌 나그네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풍경과 외길은 끝없이 이어졌다.

  세이린산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 길은 구불구불 이어지다가 결국에는 산의 정식 오솔길 쪽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간에 막다른 것처럼 보이는 곳으로 향하는 갈림길로 꺾어 들어가면 커다란 바위 두 개가 맞닿아 작은 동굴 같은 통로를 이룬 곳이 나온다는 것은 아는 사람만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그 동굴 너머의 넓은 골짜기에 터를 잡은 사람들이었다.

  험한 절벽으로 둘러싸인 골짜기 깊은 곳에는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하나의 작은 마을이라고도 할 법한 공동체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왕궁을 향한 칼날을 갈고 있는 반란군의 본거지였다.

  "테츠야 님!"

  테츠야가 산채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사람들이 그를 반겼다. 아이들은 그에게 달려들었다. 

  산채의 구성원 대부분은 젊은 남성들이었지만 그들 외에도 소수의 노인, 여성, 아이들도 있었다. 현 왕실과 신료들의 폭정에 못이겨 직접적인 싸움이 아닌 부분을 돕고자 자원을 한 과부들이나 부대 소속 군사의 가족들이 그런 경우였다. 대부분의 참여 인원은 산채에서 주거를 하지 않고 외부에서 주기적으로 훈련만 받으러 오가는 이들이었지만 그 주기가 짧아 의심을 살 만한 주요 인물들이나 외부에서 가족들을 부양하기 어려운 이들은 산채에 가족을 모두 데려다 놓기도 했던 것이다.

  "테츠야 님! 이거 보세요!"

  이제 막 4살이 되는 작은 사내아이 하나가 테츠야를 향해 밝게 말했다. 테츠야는 몸을 낮춰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뭔가요?"

  그가 옅게 웃으며 물었다. 아이는 신이 나서 온몸을 들썩여가며 말했다.

  "이게 민들레 씨앗이래요! 씨앗 안 같은데 씨앗이래요! 후우 불면 날아간대요!"

  아이가 손에 든 하얗고 동그란 뭉치가 달린 작은 꽃줄기를 내밀어 보이면서 말했다. 물론 테츠야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지만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정말 신기하네요. 그래서 많이 불어서 퍼뜨려 줬나요?"

  아이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런 아이를 보는 테츠야의 눈은 평소의 냉철함을 잃고 따뜻함만을 품어냈다.

  신나게 팔을 휘젓는 아이의 뒤에 테츠야 또래의 젊은 남자 하나가 나타나 아이를 안아 올렸다.

  "자, 소우타. 신나게 놀았으니까 이제 간식 먹으러 가자. 미토베 형이 맛있는 거 해 준대!"

  "간식! 맛있는 거!"

  아이는 안긴 채 양팔을 위로 쭉 뻗으며 외쳤다. 아이를 안아든 츠치다 사토시가 테츠야를 보며 웃었다.

  "좋은 하루입니다, 테츠야 님. 번거롭게 해서 죄송해요."

  테츠야 역시 웃는 얼굴로 응답했다.

  "번거롭다니요. 그럴 리가 있나요. 좋은 하루입니다."

  츠치다가 산채의 끝자락에 위치한 가장 높은 건물을 가리켰다.

  "휴가와 이즈키는 안에 있습니다. 키요시도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테츠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한 그는 소우타에게도 인사를 한 뒤 츠치다를 지나쳐 본채로 향했다.




(13) 왕은 지도자였고 나라의 주인이었으며 백성들의 어버이라 불리는 존재였다. 즉 한 나라를 책임지는 사람이자 백성에게는 조정을, 다른 나라에게는 백성을 대표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니 나라의 정치가 어긋나고 백성의 삶이 팍팍해질 때 가장 먼저 험한 말을 듣게 되는 것 또한 왕이었다. 물론 그 누구도 왕의 용안에다 대고 직접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꿈조차 꾸지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그 일이 매일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랏님은 무얼 하시길래 이 꼴이래.

  전하께선 우리 같은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으시지.

  흥. 쇼고는 크게 한숨같은 코웃음을 쳐 보았다. 저들이 장본인 앞에서 나라의 가장 높은 사람을 욕하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겠지.

  부정할 생각도 없었고 그럴 수 있는 상황도 더더욱 아니었다.

  무능한 주상.

  그것이 현실이었으니까.

  하나미야는 종종 능글거리는 웃음이 진 얼굴로 슬쩍 묻곤 했다.

  저것들 그냥 가만히 두렵니까?

  정말로 답을 기다리는 말은 아니었다. 돌아올 대답이 무엇인지는 그 역시도 알고 있었으니까.

  냅둬. 

  거기에 대하는 하나미야의 말 역시 늘 같았다.

  아주 너그러운 군주십니다.

  감히 왕의 호위무사 주제에 전혀 숨기지 않고 비꼬는 그에 대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처럼 어쩌면 쇼고는 정말로 너그러운 왕인지도 몰랐다. 체념이 너그러움으로 포장될 수 있는 것이라면.

  군주로서의 자격이나 능력을 의심받는 상황에 대해 쇼고는 어떤 대응을 할 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면서도 한편으로는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것은 진심으로 울분을 느끼는 것이라기보다는 공허한 자조였다고 하는 것이 더 알맞은 표현이었을 것이다.

  왕 노릇이 쉬운 건줄 아나. 쇼고는 생각했다. 다들 왕은 그저 좋은 것 갖다 바치는대로 입고 먹고 하면서 말 한 마디 명령을 내리면 다인 줄 알지. 틀린 말은 아니려나. 원래대로라면, 정말 진정한 왕이라면 그럴지도 모르려나. 

  하지만 그것이 명분 뿐인 왕이라면. 자식을 왕으로 세워 놓고 전에는 누려보지 못했던 권세를 누리고 싶은 어머니의 장기말 밖에 되지 않는다면. 말로만 전하 전하 하면서 떠받드는 것들이 사실은 언제 돌변하여 목에 칼을 겨누는 살수가 될지 모른다면. 자신이 내릴 수 있는 명이라고는 '그대들이 알아서 하시오'라는 단 하나 뿐이라면.

  언젠가는 그에게도 포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십 년이라는 얼마 되지 않으면서도 평생이나 다름 없는 것 같은 아득한 시간이 흐르기 전에는 그런 꿈을 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같은 또래로 태어났지만 태생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늘 아바마마의 사랑을 받으며 따스한 햇빛 속에서 살았던 왕세자와는 하늘과 땅보다도 더 먼 처지에 있으면서도, 자신은 평생토록 그 자리에 올라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당연시하며 살아왔던 어린 나이에도 지금보다는 나은 목표를 그리며 살아왔던 듯도 했다. 뜻하지도 않게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수 있을 법한 나이에 남들에 의해 그저 허수아비 같이 왕위에 떨어졌을 때에도 나름 새로이 생긴 자신의 지위와 힘을 사용해 보고 싶은 생각을 했지 않았던가. 선대왕처럼 성군이라는 평가를 역사에 길이 남기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언젠가는 그려보지 않았던가.

  그런 생각들은, 그런 과거 순진했던 날들의 허상들은 현재 그가 따르고 있는 술이 목구멍으로 훌쩍 넘어가면서 텁텁하고 마른 입맛만을 남기듯 씁쓸하고 허탈한 감정만을 남긴 채 저 멀리 사라져 버린지 오래였다. 이제는 그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힘 없고 설 자리가 없는 왕. 그저 한낱 꼭두각시 인형에 지나지 않는 자신의 처지에 적응을 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인형에게는 삶이 없다. 의지도, 감각도 없다. 그러니 누가 무슨 말을 한들, 그것을 듣게 된다 한들 인형은 팔 하나 손가락 하나조차도 움직일 수 있는 능력도 그런 생각을 가질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 어떤 비방을 듣고 그 어떤 손가락질을 당한다 해도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참을 수 없는 것이 딱 한 가지 있었다. 

  "불러 봐."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늘 차가운 얼굴과 총기가 넘치면서도 흐릿한 듯한 눈빛으로 슬쩍 웃음을 흘리는 것이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칼날보다도 날카롭고 그 어떤 한겨울 추위보다도 싸늘했다.

  "불러 보라고 했다."

  궁녀는 눈에 띄게 떨고 있었다. 그녀보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더욱 잘 표현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 같았다. 얼마나 겁을 집어먹었는지 눈 안 가득 고인 눈물은 차마 떨어뜨리지도 못했고 혹여 실수라도 할까 입 안쪽을 깨물어가며 다문 입 너머에서 멈출 수 없는 딸꾹질이 올라왔다. 그 모습 하나 하나를 다 지켜보고 있는 쇼고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모습으로 궁녀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뒤에도 그녀가 차마 입을 열지 못하자 쇼고는 그대로 옆에 서 있는 호위무사의 허리춤에 걸친 칼집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칼날이 눈앞에 들이닥치자 궁녀는 다리가 풀린 것인지 제 의지대로 움직인 것인지 모를 모양새로 바닥에 털썩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저, 전하! 소녀,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죽을 죄?"

  쇼고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차갑게 내뱉었다.

  "그래, 감히 어명을 거역하는 것은 죽음을 부르는 죄지. 그러니 순순히 부르라 하지 않더냐."

  궁녀는 바닥과 한 몸이라도 되려는 듯 잔뜩 허리를 숙이고 바닥에 머리를 닿은 채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했다. 서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욱 더 큰 떨림이 보였다.

  "하, 하오나…."

  "네 원대로 정말 죽을 죄로 다스려 주기를 바라는 것이냐."

  그것은 더 이상 물음이 아니었다. 이제는 정말, 아니 어쩌면 애초부터 선택권이라는 것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궁녀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부들부들 떨어가며 열었다. 울먹이는 것인지 떨고 있는 것인지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가 천천히 읊기 시작했다.

  "화, 화염에… 화, 화염에 잠재운 그림자여. 재, 잿빛에 뒤덮인 그, 그림자여. 그, 그림자가 되, 되어 버린 부, 불꽃이여. 환영이 되어 버린… 태양이여. 기다리네, 기다리네. 꺼, 꺼져가는 불씨를… 일으켜 주오. 어둔 밤을 밝히-"

  끊어질 듯 가엾고 힘없이 이어지던 노래는 그녀의 입에서 토해져 나온 피로 끝났다. 목소리가 끊어짐과 함께 몸의 떨림 역시 멎었다. 쇼고는 궁녀의 등을 관통했던 칼을 다시 뽑아들었다. 칼날과 함께 피가 솟구쳐 튀어올라 쇼고는 물론이고 근방에 서 있는 시종과 다른 궁녀들을 향해 사방으로 튀었다. 그들은 모두 시선만 내리고 공포에 떨고 있다가 죽어가는 궁녀가 마지막 손길이라도 뻗듯 저들에게로 날아오는 핏방울에 제 목숨을 구명하려는 듯 움찔 뒷걸음질을 쳤다. 

  쇼고는 자신의 옷을 물들인 그 붉은 얼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명을 받들지 않는 것도, 반란을 꾀하는 것도 죽을 죄지."

  그가 읊조리듯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니 너희는 부르지 말거라. 지척에서 나를 모신다는 아이들이 감히 그 주인에 반하는 생각을 입에 담으면 쓰나."

  쇼고가 쥐고 있던 칼을 그 주인의 발치에다 가볍게 던졌다. 쇳날이 바닥에 튕기며 찰그랑 소리를 냈다. 그 순간 대전 문이 열렸다.

  "주상!"

  쇼고는 자신의 어머니를 향해 느릿하게 시선을 옮겼다.

  "어마마마. 어인 일로 예까지 오셨습니까."

  충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얼굴을 한 이는 이제는 대비의 자리에 올라선 회빈이었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가볍게 대꾸하는 쇼고와 마지막 순간까지 쪼그라들듯 엎어진 채 숨이 멎은 궁녀의 사체를 차례로 눈에 담은 그녀는 말문이 막힌 듯 입만 벙긋거리다가 가까스로 말을 뱉어냈다.

  "이게,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쇼고는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대답했다.

  "불손한 말을 입에 담아 엄히 벌하던 중이었습니다."

  "불손한 말이라니요?"

  "어마마마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요즘 저자에 해괴한 참언이 돈다는데, 그 누구보다 궐 안팎 사정에 훤하신 어마마마께서 모르실 리가 없지요."

  대비는 흠칫 놀라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쇼고는 제 안으로 코웃음을 쳤다. 자신의 머리 위에 아무것도 없는 듯 늘 당당한 대비에게 유일한 약점이 끝내 확인하지 못한 세자의 생사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민가에 떠도는 그 출처를 알지 못할 참요는 지금껏 애써 무시해 왔던 세자의 존재를 다시금 일깨우는 선포요, 현 왕실이 지은 죄를 옭아매는 형틀이나 마찬가지였다.

  "뭘 그리 놀라십니까. 이런 피 한 방울쯤이야 어마마마께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대비의 얼굴이 한없이 일그러졌다.

  "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겝니까?"

  왕궁 사람들은 물론이고 민가까지 10년 전 정변을 모르는 이가 없는 마당에 위엄과 우아함을 잃지 않으려는 대비의 갖은 노력에 쇼고는 우습고 가증스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저를 낳고 기른 친어머니임에도, 자신이 지금껏 살아서 왕이라는 자리에 올라 편하게 입고 먹고 마시게 해준 존재임에도, 그 모든 것을 분명히 알고 자각하고 있음에도 그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자신이 수혜자라고 해서, 자신을 위해 한 일이라고 해서 그 행위가 떳떳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쇼고는 태연하게 받아쳤다.

  "소자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어마마마께서 모르실 리는 없을 텐데요."

  그리고 대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기도 전에 그는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 시종을 향해 말했다.

  "잠행을 나갈 것이다. 하나미야를 부르고 채비하거라."

  윗전의 눈치만 살피고 있던 시종이 얼떨결에 더듬더듬 대답을 했지만 이미 쇼고는 대전을 나간 뒤였다.

  따르는 시종도 버려두고 홀로 침전으로 향하는 쇼고의 머릿속에는 궁녀의 말만 맴돌고 있었다.

  그림자가 되어 버린 불꽃이여. 환영이 되어 버린 태양이여.

  환영이 되었어도 태양은 태양이라, 그 말인가. 

  불꽃. 태양. 

  태양.

  네가 태양이라는 것인가.

  아니. 태양은 나다. 태양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은 너일지 모르나 끝내 태양이 된 것은 나다. 아바마마에게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은 것은 너일지 모르나 아바마마의 자리를 이은 것은 나다. 너는 태양이 되지 않고서도 살아 남았을지 모르나 태양이 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는 것, 그것이 나다.

  쇼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니 나는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 ....

저 분명 임시 저장글 비우기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한 달 반은 넘은 것 같죠....

분명히 일주일 내에 모든 저장글 다 비워버리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이죠....

... ....

후우... 제 게으름과 산만함을 탓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 ._.)

으으 진짜 생각하는대로 바로 글로 옮겨질 수 있으면 참 좋겟어요ㅠㅠ 구상하는 것은 순간이고 진짜 재밌는데 막상 글로 정리하다보면 맨날 헤매서 말이죠...


사실 연예계 AU를 마무리짓고 올리려고 계속 미루고 묵혀두기만 했던 건데 연예계 쪽이 참 안 풀리더라구요... (...)

그래서 일단 이거라도 먼저 올립니다 ( ._.)

십이야 정말 제 인생 웹툰 중 하나입니다ㅠㅠ 단행본까지 사 모은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거든요

동양풍에 시대물/사극을 굉장히 좋아하는 저로서는 아주 안성맞춤인 작품이었고 작화랑 구성, 연출이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굉장히 추천하는 웹툰이에요.

원래 한 편으로 끝내려다가 길어져서 자르긴 했지만 결말 부분에서는 웹툰 결말의 중요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다음 편을 읽으실 분들은 유념해 주시기 바라요. 작품 자체적으로 굉장한 스포일러라서 사실 조심스럽긴 했는데 그 부분이 이 AU를 쓰게 된 핵심적인 부분과 이유이기도 해서 어쩔 수가 없네요ㅠ 웹툰 자체가 완결된지 꽤 오래 되기도 했구요.


요즘 계속 쿠로바스 글만 올리고 있는 건 기분탓이 아닙니다 (...)

저장글의 90%가 쿠로바스 글이었던 데다가 요즘 한창 재버닝을 했던 터라서 말이죠.. 저장글을 줄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늘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

요즘 하도 여러가지로 시끌시끌하고 코로나 바이러스 문제로 집에만 처박히게 됐으니 한가해서 다시 한 번 저장글 싹 다 비우기 프로젝트를 재개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전에 구상한 것 +a로 중간중간에 새로 또 구상해서 추가된 것까지 해서 몇 편 계속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근데 계속 하나에 집중을 못하고 지지부진해서 누가 좀 옆에서 감시하고 독촉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이런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계속 문제가 되고 있는데 정말 건강 꼭 조심하시고 무사하시기를 바라요ㅠㅠ



Twitter: @sinarae_kor FF.net : lisa-sinarae AO3: lisa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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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그림 시나래 (2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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